• [문화재유적지] 우리동네 문화재를 찾아서 제 9편 신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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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박일호기자
  • 19.10.11 09: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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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떠나는 여행, 우리동네 문화재를 찾아서

제 9편 신니면

 

여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힐링의 수단이다. 단순하게 먹을거리부터, 체험, 즐길거리 까지 다양한 방식의 여행들은 우리 삶의 활력소가 된다. 멀리 떠나지 않고 우리 지역 가까운 곳이라도 잠시 일상을 내려놓는 여행을 떠나면 힐링의 의미는 두 배가 된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에 의미까지 더해지면 어떨까? 바로 문화재 여행이다. 수 많은 관광주제가 있지만 이 만큼 의미가 깊은 것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의미있는 우리지역 문화재 여행, 떠나보자.

 

◆ 박팽년 사당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참샘길 113
주요 문화재 : 충주 박팽년 사당(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

 

우리동네 문화재 특집 제 9편은 신니면으로 떠나보았다.

 

 

첫 번째로 소개할 문화재는 신니면 신청리에 위치한 박팽년 사당이다. 면 3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조선시대의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1417 ~ 1456)을 모신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사당은 숙종 신미(1691)년 건립되었지만 오랜세월이 지나며 낡은 모습을 1968년 새롭게 복원하였다.

 

박팽년은 조선조 세종때 집현전 학자이며 세조의 찬위에 반대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극형당한 사육신중 한사람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일원이고 그의 부조묘가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에 있다. 박팽년은 태종17년(1417년)에 태어났으며, 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더불어 집현전에 소속되어 한글 창제에 많은 공을 보탰었다.

 

상당한 연대가 느껴지는 돌을 밟으며 들어선 사우는 비교적 아담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의 복위 운동을 계획했던 사육신 박팽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만큼 사우는 잔잔하면서 왠지모를 슬픔의 파도가 가득차 있는 듯 하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학식이 뛰어난 학사에서, 신하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친 충신의 표본 ‘박팽년’. 박팽년의 사우를 돌아보면 그 예전 피가 흥건이 흐르던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잠시나마 전해진다.

 

▶ 신청리 고인돌

주소 :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502
주요 문화재 : 충주 신청리 고인돌 (충청북도 기념물 제133호)

 

충주 신청리 고인돌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에 있는 청동시대의 고인돌이다. 2004년 11월 26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개석식 지석묘(지하에 만든 무덤방을 덮을 때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바로 올리는 형식의 고인돌)이다. 지석묘 주변 1,789㎡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정해져 있다.

 

 

충주 신청리 지석묘의 덮개돌 크기는 가로 4.82m, 세로 3.70m, 높이 1.25m이며 무게는 약 20t에 이른다. 본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지석묘인 데다 덮개돌 윗면에 지름 약 3.5~10cm, 높이 약 1~3cm의 크고 작은 굼(성혈 星穴) 141개가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거석문화 연구자료, 특히 매장행위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덮개돌의 141개 굼 중 곱게 갈아 파 놓은 것은 81개, 거칠게 판 것은 60개이다.

 

 

2019년 현재 밭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지석묘. 주변에서 다양한 삼국시대 토기편과 자기편들이 출토되었으며 관광객들이 편하게 오고갈 수 있는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견학리 토성

주소 :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 441
주요 문화재 : 충주 견학리 토성(충청북도 기념물 제137호)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에 있는 삼국 시대의 성곽이다. 낮은 구릉의 끝 부분에 위치한 평면 네모꼴의 토성인데 충주지역 유일의 네모꼴 토성으로 중요시된다.

 

 

충주 가섭산의 동쪽 낮은 구릉에 있고, 성 안은 경작지이며 북벽·동벽은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서벽은 없어지고 남벽은 일부만 남았다. 성벽의 높이는 2∼3m이고 성벽 바깥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성벽은 서벽의 아랫부분에서 납작한 돌들이 나타남을 보아 기단부는 성벽의 안팎 언저리에 돌을 깔아 만들고, 그 위로 일정한 간격의 얼개를 만들어 흙을 넣고 다지는 판축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부분은 넓고 높게 축조되었고 물이 북벽의 서단과 동벽의 남단으로 빠지도록 성벽의 절단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문터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는 약간의 삼국 시대에 속하는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우리 나라의 옛 성터로는 이러한 네모꼴이 거의 없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영향이 컸던 어느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그 시기는 대략 우리 나라에 있어서 국가의 발생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큰 공장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고 보존상태가 좋지 않고 단순한 언덕으로도 착각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와 보기엔 다소 아쉬워 보인다.

 

『취재:박일호기자/m1236@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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