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유적지] 우리동네 문화재를 찾아서, 주덕 / 대소원면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박일호기자
  • 19.09.20 09:27:07
  • 공감 : 0 / 비공감 : 0
공감 비공감

 

과거로 떠나는 여행, 우리동네 문화재를 찾아서

 

제 7편 주덕 / 대소원면

 

여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힐링의 수단이다. 단순하게 먹을거리부터, 체험, 즐길거리 까지 다양한 방식의 여행들은 우리 삶의 활력소가 된다. 멀리 떠나지 않고 우리 지역 가까운 곳이라도 잠시 일상을 내려놓는 여행을 떠나면 힐링의 의미는 두 배가 된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에 의미까지 더해지면 어떨까? 바로 문화재 여행이다. 수 많은 관광주제가 있지만 이 만큼 의미가 깊은 것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의미있는 우리지역 문화재 여행, 떠나보자.

 

◆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산101 용화사
주요 문화재 :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충북도유형문화재 제311호)

 

 

 

우리동네 문화재 특집 제 7편은 주덕읍과 대소원면에 위치한 문화재를 소개한다.

 

먼저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주덕읍 삼청리에 위치한 용화사에 자리잡고 있는 불상조각이다. 왼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보주 또는 연봉우리와 같은 형상이지만 확실한 지물은 알 수 없다. 얼굴 부분에 마모가 심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925년에 노천에 있던 석불을 발견하고 그 장소에 태고종 소속의 용화사를 창건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대좌는 새로 조성한 것이며 얼굴부분과 광배의 일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상의 뒷부분은 정으로 쪼아 거칠게 다듬어 놓았다.

 

당당한 어깨에 단구의 비례를 보이는데 이는 불상 하단부가 대좌 속에 묻혔기 때문이다. 얼굴은 거의 마모되었고 머리의 부분도 없어졌는데 얼굴은 동그란 형태이다. 귀는 길어 거의 어깨에 닿아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까지 들어 손가락을 구부린듯한데 명확하지 않다. 왼손은 가슴 앞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약함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다. 대의는 편단우견이며 옷주름은 단순한 편이다. 다소 굽이진 길을 찾아가야 하지만 관광객들이 관람하기에 적합하도록 별도 공간에 잘 보관되어 있다.

 

▶ 혜원정사 석불좌상 및 복장유물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만정길 194
주요 문화재 : 충주 혜원정사 석불좌상 및 복장유물 (충북 유형문화재 제351호)

 

 

 

혜원정사 석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 351호로 지정된 조선후기 석불좌상 3구와 유물이다. 필자가 찾아 갔을때 인적이 없고 봉안되어 있어 사진촬영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사진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선포털 이미지로 대체한다. 보살상의 높이 67㎝, 여래좌상의 높이 33㎝, 나한상의 높이 28.2㎝. 3구의 상들은 모두 불석으로 만든 불상들로, 표면이 채색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들은 현재 충주 혜원정사에 봉안되어 있으나, 2009년까지 보은군 삼년산성 내 보은사에 전하던 상들이다. 보은사는 100여 년 전에 법주사의 승려 박경하가 창건한 절이다. 따라서 법주사에 봉안되었던 불상들이 보은사 창건 이후 보은사로 이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2009년 이후 보은사에서 같은 계통의 사찰인 충주 혜원정사로 옮긴 것이다.

 

 

▶ 이상급 신도비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504
주요 문화재 : 이상급 신도비(충북 유형문화재 제63호)

 

이상급 신도비는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었다. 비는 8각의 대석 위에 8각기둥형의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형식이다. 석재는 흰색 대리석이다. 대석에는 8면에 걸쳐 조각을 하였는데, 6면에는 연꽃을, 대칭되는 2면에는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면은 큼직큼직한 연꽃잎 8개를 조각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다.

 

이상급은 선조 39년(1606) 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박사 등을 지내고, 형조좌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도사를 거쳐 풍기군수를 역임하였다. 그 후 이이첨과의 불화로 형 상길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충주로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다.

 

인조반정 후 다시 단천군수 · 연안부사를 역임하고, 병조참가 되어 군사와 성곽을 정비하는 등 군비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종했으며, 강화 후 묘사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형을 찾아가던 도중 적병에게 피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순조 때에 충강공의 시를 받았다.

 

『취재:박일호기자/m1236@chol.com』


Tags :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쓰기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