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유적지] 과거로 떠나는 여행, 우리 동네 문화재를 찾아서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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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양현모기자
  • 19.07.26 08: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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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편 문화유산의 보고,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

 

여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힐링의 수단이다. 단순하게 먹을거리부터, 체험, 즐길 거리 까지 다양한 방식의 여행들은 우리 삶의 활력소가 된다. 멀리 떠나지 않고 우리 지역 가까운 곳이라도 잠시 일상을 내려놓는 여행을 떠나면 힐링의 의미는 두 배가 된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에 의미까지 더해지면 어떨까? 바로 문화재 여행이다. 수많은 관광주제가 있지만 이 만큼 의미가 깊은 것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의미 있는 우리지역 문화재 여행, 떠나보자.

 

◆충주미륵대원지(忠州彌勒大院址)

 

주소 :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
주요 문화재 : 충주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충주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충주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충주미륵대원지 석등(충북유형문화재 제19호)
              충주미륵대원지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제33호)
              충주미륵대원지 석조귀부(충북유형문화재 제269호)
              충주미륵대원지 사각석등(충북유형문화재 제315호)

 

우리 동네 문화재 특집 제 2편은 가히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수안보 미륵대원지다. 미륵대원지는 충주 관내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고, 가까운 주변에 여러 볼거리와 휴식공간, 편의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여행 장소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미륵대원지는 고지대에 위치한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충주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기단 하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추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충주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조여래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현재 석조여래입상이 무기한 보수작업으로 인해 제대로 관람할 수 없다.

 

◆충주미륵대원지 석등(유형문화재 제19호)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상·중·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윗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추켜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충주미륵대원지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33호)

 

 

 

석굴이 있는 미륵사터 경내에서 동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곳이 원래의 터로 추정되는데 절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왜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 몸돌의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시대가 고려로 내려옴으로 인해 지붕돌 밑면받침 수가 4단으로 줄어드는 등 후대의 양식이 나타난다. 대체로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갖추었다.

 

◆충주미륵대원지 석조귀부(유형문화재 제269호)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귀부로 원위치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비신은 남아 있지 않으며 비신꽂이 홈이 조성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어서 실제 비신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귀갑문은 표현되지 않았고 거북등 좌측 경사면에 2마리의 새끼거북이 새겨져 있다.

 

◆충주미륵대원지 사각석등(유형문화재 제315호)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 수도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미륵리 사지에 이런 양식의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와 같은 화사석 결구 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ㆍ현화사ㆍ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었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취재:양현모기자/m1236@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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