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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 <전통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하지훈의 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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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양현모기자
  • 19.04.11 09: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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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훈의 ‘자리(jari)’를 보자마자 동시에 떠 오른 의자는 베르너 팬톤의 ‘3D carpet’. 두 작품 모두 좌판이 아닌 바닥에 앉아 기댈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자세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조형적 유사함에 불구하고 두 의자가 내뿜고 있는 느낌의 차이를 보라. 소위 콘셉트의 차이, 디자인 요소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감각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하지훈의 ‘자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앉아 시선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의자다. 반면, 팬톤의 ‘3D carpet’은 인간의 정형화된 자세를 혐오해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모임을 추구한다. 이 두 작품의 시발점은 두 작가가 살았던 도시(서울, 코펜하겐과 바젤)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고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창조되는 모든 것들에게 요구되는 고유한 콘셉트다.

 

하지훈과의 인연은 1996년 덴마크 인터내셔널 스터디 프로그램(Denmark International Study Program, 이후 DIS)에서 시작됐다. 미국 유학시절, 우연히 한 학기를 보냈던 DIS와 덴마크는 내게 모든 면에서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질문과 성찰들이 4달이 채 안 됐던 바로 그 시기에 발아했다. 당시 나는 실내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덴마크에 살면서 그들의 가구디자인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한국에서 가구 디자인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DIS를 소개하고 싶었다. 홍익대학교 최병훈 교수님의 도움으로 4년간 한국 학생들만을 위한 하계 가구 디자인 워크숍을 기획했고, 나는 코디네이터 겸 통역으로 참여했다. 하지훈은 첫 해 참가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4주간의 경험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컸을까? 이후 그는 당시만 해도 드물게 덴마크 디자인스쿨(Denmark Design school)로의 유학길을 떠났다.

 

워크숍 기간 동안 내가 기억하는 하지훈은 조용한 친구였다. 그의 작업도 그를 닮아 조용했다.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가구 브랜드, 공공기관, 장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을 해 왔다. 그의 행보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 힘의 원천이 부러웠다. 협업에 필요한 소통의 기술은 디자이너에게 숙명적인 것이지만 내겐 늘 상당히 어렵고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겐 쉬웠을까? 말 못 할 사연이 없기야 하겠나 만은, 20년 전 내가 봤던, 차분하고 무던하며 겸손한 품성으로 하지훈은 무수히 많은 갈등의 순간들을 넘어왔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20년 전의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옷차림, 말투, 표정의 하지훈과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나는 그의 작품이 표출하고 있는 전통의 해석에 관심이 있었다. 자리(jari), 블랙큰(blacken)처럼 좌식문화라는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 한 작품이 있는 가하면, 나주 체어, 자개 벤치처럼 전통의 양식과 기법을 직유적으로 접목한 작품이 있다. 하지훈이라는 한 사람에게서 때론 과거가, 혹은 현재가 아니면 미래의 모습이 다양한 비율로 표출되는 현상이 흥미롭다. 그리고 나는 그 다양함이야 말로 하지훈 개인의 정체성이 잘 투영된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장인들과의 작업에서는 과거의 흔적이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기업과의 협업에서는 현재의 가치가, 공공기관과의 협업에서는 미래의 가치가 더 잘 보인다. 의도했을까? 그랬다기보다는 각각의 상황에서 협업의 대상이 된 상대방에게 충실히 귀 기울인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자 도착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의자는 자리(jari)였다. 사실 작품의 이름이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한다. 특정한 위치나 자세를 갖출 필요 없이 늘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곳, 지나가는 누군가를 부담 없이 곁으로 초대할 수 있는 곳, 의자가 아니라 사람이 앉는 순간부터 비로소 의미가 부여되는 곳, 시선의 높이가 내려가면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나를 낮출 수 있는 곳, 다가가는 것도 거리를 두는 것도 쉽고 자연스러운 곳 등 좌식문화가 보편적이던 우리네 공간에서 늘 가능하던 ‘자리’의 가치를 고스란히 살렸다. 의자가 사람의 몸을 담는 그릇이라고 볼 때,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친숙한 개념이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 더 잘 팔린다. 우리는 오히려 잘 모르는, 바닥에 앉는 자세와 행위의 즐거움을 그들은 더 쉽게 발견한다. 오래전 코펜하겐에서 우치다 시게루의 다실 시리즈가 전시됐을 때, 덴마크인들은 다실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아 차를 대접받는 경험에 열광했다. 다실 자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모습을 단순화시킨 사각 박스에 불과했지만 그 박스가 담고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이 즐겨하던 공간과 차문화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가깝고도 먼 우리 두 나라의 확연히 다른 ‘앉는 문화’다. 좁은 공간에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야 하는 긴장된 일본의 문화와 달리 우리는 펼치고 풀고 늘어져 앉기를 즐긴다. 다리를 뻗을 수 있어야 하고 등도 기댈 수 있어야 한다. 누울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하지훈의 ‘자리’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의 전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리’의 모티브가 됐던 첫 번째 작품은 덴마크 유학시절에 탄생했다. 라탄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앉고 기대고 쉴 수 있는 규모였다<사진 1>

 

 하지만 이 의자는 이후 자연스럽게 진화했다. 2012년 덕수궁 프로젝트에서는 덕홍전 바닥을 다 덮을 만큼 커졌다. ABS 진공 성형을 한 후, 라탄과는 전혀 다른 물성인 크롬 도장으로 마무리했다. 형태와 질감은 천정의 화려한 단청을 왜곡하고 반사했다. 단청은 과거의 박재된 패턴에서 벗어나 살아서 꿈틀거렸다<사진 2>.

 

전시 기간 중 사람들은 작가가 마련한 ‘자리’에 앉고 머물렀다. 덕수궁이라는 아픔답고도 슬픈 장소의 의미를 직접 느끼고 생각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가 머물었으며,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바로 그 장소. 사람들이 앉아 있는 동안 ‘자리’는 덕홍전과 단청을 위한 조연으로 물러나 겸손하게 침묵한다. 작가의 소통 능력에 의해 탄생한 이 프로젝트는, 스스로도 주변의 공간과 소통하며 진화와 변신을 계속한다.  

 

하지훈 작품 영감의 근원은 조선의 목가구다. 덴마크 유학시절 이토 토요가 했던 “조선 시대 목가구를 절대 잊지 말라”는 말은 촌철살인이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혔다. 해방 이후 초압축 성장을 겪어 낸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모든 것들을 선진국으로부터 빠르게 습득하고 활용하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의 뿌리를 탐구하고 해석할 수 있는 촉과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디자인은 국적을 알 수 없고 어디선 본 듯한 느낌으로 공중에 붕 떠 있거나, 뿌리만 견고히 내리 박혀 고집스러운 물건들로 양극화됐다. 그에 대한 문제제기, 성찰, 대안 찾기가 지속됐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고 본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사례를 폭넓게 발굴 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예와 디자인, 전통과 현대, 직유적 콘셉트와 은유적 콘셉트 사이에서 다양한 작품을 실현하고 있는 하지훈의 행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지금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미래가 있을까? 교육현장에서 늘 해 보는 질문이다. 미래가 있다고 말 할수 있어야 내 직업과 삶에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우리에겐 아직도 발견하고 해석해 낼 수 있는 과거의 가치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앞서간 이들의 뒷모습을 종종 거리며 따라가는 것을 멈추고, 하지훈처럼 차분히 앉아 주변과 과거를 돌아볼 일이다. 덴마크인들이 늘 말하듯, 미래는 과거에 있다. 지금 우리에겐 특히 그렇다.

 


<사진 1> ‘자리’의 모티브가 됐던 첫 번째 작품

 


<사진 2> 2012년 덕수궁 프로젝트, 덕홍전에 전시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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