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유적지] 2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충주성터'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양현모기자
  • 19.02.19 09:25:27
  • 공감 : 0 / 비공감 : 1
공감 비공감

 

충주성터는 유인석이 이끌었던 호좌의진 전투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역사적 장소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친일내각의 단발령에 분노하여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896년 2월 15일 유인석의 의병 부대인 호좌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는 당시 관찰부가 있어 호서지방의 요지이므로 이곳을 점거하면 호서 일대를 장악하는 발판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충주성은 경병 400명, 왜병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 명의 군대가 충주성에 있어 공격이 어려웠다.

 

2월 16일 유인석은 군사 4,000명을 거느리고 제천을 출발했다. 2월 17일 호좌의진은 지방대 두령들의 협조로 성문이 열려진 충주성의 남문과 북문을 통해 무혈 입성했다. 유인석은 입성 후 의병 토벌죄 및 단발 강요죄 등을 내세워 관찰사 김규식을 처형하였다.

 

2월 17일부터는 충주성, 가흥, 수안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 중군장 이춘영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으로 진군하여 좌우에서 병참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하였다. 이때 일본군 7명이 병참 밖으로 나와 응사하였다. 1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이춘영은 일본군이 발사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2월 23일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넘어 의진에서 기습공격을 가하는 일본군 60여 명을 격퇴시켰다.

 

2월 24일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충주 향교에 불을 질러 모든 위패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29일 일본군은 단월 방면에서 2일 동안 다시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호좌의진은 근처 요해처를 지키던 군사를 성안으로 불러들여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3월 2일 가흥에서 출동한 일본군 3개 중대가 다시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성안으로 포를 난사하고 사다리로 등성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의병과 일본군 간에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틀간의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민가 100여 호만의 남을 정도로 폐허로 변했다.

 

3월 5일 호좌의진은 관군과 일본군의 양면 공격으로 양식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청풍으로 진을 옮겨야 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저항의지를 분쇄하려고 하였는데, 그 시작이 서울 도성과 각 군의 읍성을 철거하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30일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발족하고 급속히 충주읍성을 비롯한 각 지역읍성의 성벽을 대부분 헐어냈는데, 이는 읍성이 갖고 있던 상징적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다.


 



Tags :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쓰기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